학인당
2009.08.30.월 A30
(조용현 살롱(698)
판소리 古宅
한말(韓末) 전주의 만석꾼 부자였던 백(白)부자가 지은 집이 교동에 있는 학인당(學忍堂)이다. 1905년에 시작해서 1908년에 완공한 99칸 저택 학인당은 보통 한옥이 아니다. 판소리 공연을 염두에 두고 지은 집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100여명 가량의 청중이 모여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집의 본채 구조를 설계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채 대청마루의 천장이 2층집 높이이다. 천장이 높으니까 소리가 울린다. 또한 공연장인 대청마루를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 사방의 문을 모두 철거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유사시에 보다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학인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극장이기도 하다.
집주인인 백부자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번 중인계층이었다. 어떻게 양반계층이 아닌 중인이 이처럼 큰 저택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대원군이 돈 없고 배고팠던 낭인으로 전국을 유랑하던 시절 전주에 들렀을 때, 백부자가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 나중에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경복궁 중건을 할 때 백부자는 거액을 기부했다.
경복궁 중건 기금을 내놓으면서 백부자는 조선 왕실로부터 3가지 특혜를 받았다. 첫째는 큰 저택을 지을 수 있는 허락이었다. 둘째는 전라도에 근무하던 벼슬아치들이 임기를 끝내고 이임(離任)할 때 그 환송연을 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래서 “전라도에 부임하는 관리들의 인사권은 백부자가 가지고 있다.”라는 소문이 나왔다. 셋째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독점적 납품권을 갖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전주에서 열렸던 대사습놀이는 당대의 명창(名唱)을 선발하는 판소리 백일장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면서 관청 주도의 대사습놀이는 중단되었다. 그러자 전주의 부자들은 그 대안으로 민간주택에서 대사습놀이를 열기로 합의를 보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 학인당에는 수많은 명창이 들락거렸다. 한국 판소리의 메카인 학인당이 이번에 새 단장을 마치고 일반에게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반갑다.
바로 옆에 살면서도 이게 무엇하는 집이지?
궁금한채로 지나다녔었는데 그런 사연이 있는 집인줄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이나 지식도 이렇게 정리해 놓으면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너무 가까운 것에 대하여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가문, 내 고장, 내 나라의 문화나 역사를 다른 자료를 통해서나마 더 알아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추암 촛대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