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7.09.02 토 21
교실을 바꾼 씨앗 하나
식물의 힘 /스티븐 리츠 지음/ 오숙은 옮김/여문책/404쪽/ 2만원
먼저 개인적 체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오늘날의 고3 교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실도 삭막했다. 건드리면 터질듯한 10대 후반 남자들의 활기는 찾을 수 없었다. 전기는 작은 새 한 마리였다. 어느 집의 새장에서 탈출한 듯, 도심에서는 보지 못한 연두색 잉꼬가 교실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손으로 잡았으나, 기력이 없는 잉꼬는 달아날 생각도 못했다. 소년들은 얼마간의 돈을 갹출해 모이를 샀다. 체육복 같은 것을 담는 바구니를 거꾸로 뒤집어 새장을 대신했고, 신문지를 길게 꼬아 횃대를 만들었다. 밤의 교실이 추울까봐 안 입는 체육복을 새장에 덮어주고 하교하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자 새는 기력을 차렸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 우짖기도 했다.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였으나 꾸짖는 교사는 없었다. 며칠간 새를 돌본 소년들은 잉꼬를 원하는 이에게 인계하기로 했다. 한 교사가 기쁜 마음으로 새장을 사서 잉꼬를 데려갔다. 불과 며칠간이었지만 새와 함께한 기억은 수십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다.
교실이 사람이 아닌 생물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식물의 힘>(원제 The Power of a Plant)은 그 실험의 결과다. 빈민가 학교에 부임한 한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서 식물을 키우며 벌어지는 변화상을 담은 책이다.
시작은 전형적이다. 열정적인 선생이 문제 학생들을 사랑으로 이끄는 할리우드 영화 같다.
프로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스티븐 리츠는 다리를 다친다. 교사인 어머니의 권유로 따놓은 임시교사 자격증이 있던 그는 황량한 뉴욕 사우스브롱크스의 한 고등학교에 부임했다. 거리는 마약과 폭력에 전염돼 있었다. 교실도 엉망이었다. 학생들은 수업을 하다 말고 싸움박질을 하기 일쑤였고, 교사들조차 결근을 밥 먹듯 할 정도로불성실했다. 대단한 열정을 갖고 교사가 된 건 아니지만, 리츠는 조금 엉뚱했다.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대했고, 수업시간엔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았다.
한 사회단체가 학교 행정실에 기부한 '양파 상자'는 리츠의 교육자 경력을 뒤바꾸었다. 스포츠용품이나 과학도구 세트를 기대했던 그는 양파가 들어있는 상자에 실망해 라디에이터 뒤에 쳐박아 두었다. 6주 후, 여느 때처럼 교실에선 싸움이 벌어졌다. 흥분한 아이가 라디에이터 밑으로 손을 뻗어 양파를 집어던지려 했다. 그런데 손에 잡힌 건 양파가 아니라 수십송이의 노란색 꽃이었다. 상자에 담긴 것은 사실 수선화 구근이었고, 라디에이터의 더운 김이 구근을 싹틔운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자란 생명에 대한 경외감에 물들었다. '우주주적 경험'을 얻은 리츠는 교실에 식물을 들이기로 했다.
리츠와 아이들은 교실에 머물지 않았다. 황량해진 지역 공원에 온실을 짓고 흙을 깔았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식물을 심었다. 이들은 지역사회의 유명인사가 됐고, 다시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성공은 중독된다. 이 십대들에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리츠는 식물을 통해 교육하고 지역사회를 재생하는 프로그램에 '그린 브롱크스 머신'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활동을 확대했다.
물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파격에는 의심의 시선이 따른다. 교실에서 교과서를 보지 않고 식물을 기르는 교사에 대해 학교 행정당국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꽃을 기르는 일은 성적과는 관계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설비도 문제였다. 식물을 기르는 데 필요한 물과 흙 때문에 교실 환경이 어지럽혀지기도 했다. 양수기를 돌리기 위해선 수백달러의 전기요금이 더 필요했다. 리츠와 아이들은 전기요금을 아끼면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이들은 고대 송수로에서 중력을 이용해 물을 보내는 방법을 응용해 전기료를 줄였다. 이 설계안은 미국의 전국 실내 농업 박람회 최우수상을 받았다.
식물을 키우면서 식습관도 바뀌었다. 11세 학생 어니스트는 말했다. "자기가 먹을 채소를 직접 키우면, 그것만으로도 그 채소를 먹고 싶어집니다." 어니스트는 수확한 채소를 가족과 함께 나눠먹는다고 한다. 채소는 빈민가에 번성한 패스트푸드점 음식을 대체했다.
리츠는 말한다. "변화가 뿌리를 내리면, 거기서 새로운 싹이 튼다." 리츠는 지금도 학교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 정의를 가져다줄 사람은 자신과 학생들뿐이라고 생각한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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