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학살․․․ 왕비 시해․․․ 사내는 그 어디에든 선봉에 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98] 오지랖 넓은 친일파 이두황의 흔적
전라북도 전주 기린봉 초입에 무덤이 하나 있다. 호석(護石)을 제대로 두른 큰 무덤이다. 그 오른편에 비석이 서 있다. 높이가 2미터는 넘는다. 비석에는 무덤 주인공 행적이 가득하다. 몇 자 읽어본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섬멸하며 야전에서는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하고 조정에는 승전보를 전했다. 대인의 온화함을 지녔고 열사의 기개가 있었다. 네모와 동그라미에 모두 맞고 실천이 모두 마땅했다.’ 모든 분야에 능한 대단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더 읽어본다.
‘서호도순무영 우선봉을 겸하여 동학비적들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일청전쟁에서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에 참여해 평양 들판에서 싸워 공을 세웠다. 병신년에 국사범으로 일본제국에 망명해 십여 년을 살면서 유람했다.’ 일청전쟁? 일본제국? 더 읽어본다.
‘정미년 특사로 돌아와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됐다. 무신년에 전라북도 관찰사를 제수받았다. 경술년 일한합방 이후 공의 명성과 공적으로 도장관을 맡았다.’ 일한합방?
비석 머리에 이렇게 적혀 있다. 李斗璜碑(이두황비).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다.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다. 행적 글씨는 정병조가 썼다. 을미사변에 연루돼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래 친일 행각으로 점철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덤에 묻힌 이두황은 누구인가. 나라가 망해가는 과정 하나하나에 끼지 않은 곳이 없는 오지랖 넓고 황당하기까지 한 친일파다.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그 흔적을 찾아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조일 맹약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터졌다. 민비를 죽이겠다고 군사가 창덕궁에 난입했다. 일 년 넘게 밀린 월급을 참지 못하고 구식군대가 일으킨 반란이다. 민비는 홍계훈이라는 자가 둘러업고 목숨을 건졌다.
이두황은 그해에 군인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두황은 서울 여경방(餘慶坊)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던 사내였다. 여경방은 지금 신문로 부근이다. 1882년 2월 무과에 급제해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집이 있던 수도방위군 여경방 소대장이 되었다. 광화문 수문장, 나주 군마 관리장 따위 한직에 있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894년 민란이 터진 것이다. 썩어빠진 나라를 견디다 못해 농민이 들고일어난 동학혁명이다. 조정에서는 ‘이 모든 것이 탐관오리 탓’이라 인정하면서도 무력 진압을 택했다.
이두황은 그해 3월 동학군을 토벌하는 초토영군(剿討營軍)에 배속됐다. 사령관은 민비를 살려준 홍계훈이었다. 그런데 홍계훈이 이끄는 중앙군이 동학군에게 연전연패를 하는 것이다.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중앙군이 전멸하더니 이어 조선 황실 성지인 전주성이 함락됐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 일본군을 불러들였다. 농민군을 이끌던 전봉준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때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했던 일본군은 고종을 윽박질러 ‘대일본조선양국맹약’을 맺었다. 2조 내용은 이렇다. ‘일본국은 청국에 대한 공수의 전쟁에 임하고 조선국은 일병의 진퇴 및 식량 준비를 위해 필요한 편의를 제공한다.’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을 벌일 것이고, 그 전쟁에 조선은 협조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다.
평양전투와 이두황의 기회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전쟁을 벌였다.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천안 성환 들판에서 또 일본에게 패했다. 일본군은 패퇴한 청군을 쫓아 평양으로 진군했다. 조일맹약에 따라 조선 중앙군인 장위영(壯衛營)부대가 일본군 선봉에 섰다. 그 부대장이 이두황이었다. 8월 17일 평양전투에서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병과 평안감사 민병석 휘하의 위수병은 일본군과 청국군 양편에 각기 참가해 전투를 전개했다.(신편한국사)
이두황이 맡은 임무는 ‘일본 장굑가 훈련시킨 한국 병대 제2대대장으로 일본군과 함께 평양 산하 형세를 살피거나 적정염탐’이었다.(‘인물평론’, 한국근현대사인물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이두황은 두 달 뒤인 10월 양호도순무영우선봉장(兩湖都巡撫營右先鋒將) 발탁됐다. 양호도순무영은 동학농민혁명군 토벌 부대다. 일본군이 주축이고 우선봉과 좌선봉으로 나뉜 양호도순무영은 조선군으로 구성됐다.
동학과 이두황의 맹활약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내걸고 농민군이 재봉기했다. 죽창과 화승총을 믿고 북상하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전멸했다. 토벌군 선봉에 이두황이 있었다. 동학 기간 내내 그가 세밀하게 쓴 일기를 본다.
‘남은 적 1천여 명이 새벽하늘에 성긴 별과 같았고, 가을바람의 낙엽 같은 꼴이었다. 길가에는 총과 창이 버려지고 시신과 머리는 처참하게도 눈에 걸리고 발길에 채었다. 서쪽 해가 산과 바다에 걸려 독기가 점점 일어나고 있었다.’(이두황, 우선봉 일기 1894년 11월 17일) 그러고 한 줄 더 있다. ‘창을 휘둘러 저 지는 해를 되돌리지 못함을 한탄스러워했다.’ 우금치에서 패퇴했던 차치구라는 동학접주가 검거되자 이두황은 ‘유명한 거괴라고 하니 목을 베어 경계하라’며 즉결처형을 지시했다.
그때 일본군 소위 사이토(齊藤溫)가 주한 공사에게 보고를 했다. ‘이두황이 조선병정을 인솔해 재물을 약탈해 원성이 답지하고 있다. 솥은 무거워서 빼앗아가지 못했고 옷, 돈, 곡식, 그릇과 철물이라고 하는 것은 남김없이 약탈해 싣고 가버렸다.’ 보고에 앞서 사이토의 언질을 받은 이두황이 이리 답했다. ‘어느 겨를에 집집마다 약탈을 하겠습니까?’(우선봉일기)
우금치에서 패한 농민군은 장흥에서 최후 전투를 치렀다. 토벌군 주력부대는 일본군이었다. 석대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농민군 2000명이 전사했다. 뿔뿔이 흩어진 농민군 지휘부 색출 작전이 벌어졌다. 색출 작전 지휘관이 이두황이었다.
검거된 동학군은 대부분 재판 없이 처형됐다. 이소사(李召史)라고 기록된 한 여자 지도자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허벅지 살을 도려내는 고문을 받고’ 나주로 압송됐다. ‘며칠 못 살 것 같으나, 명령을 받을 때까지 어찌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우선봉일기 1895년 1월 1일) 압송 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니 죽었을 확률이 높다.
을미사변과 이두황
조선은 침몰하고 있었다. 유조선이 침몰하듯, 돌이킬 수 없었다. 1895년 일본군은 조선의 왕비를 살해했다. 10월 8일 새벽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은 궁궐 최북단 건청궁으로 들어가 왕비를 죽였다. 건청궁 옆 녹산(鹿山) 언덕에 왕비, 궁녀들 시신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화문을 열어주고, 건청궁까지 구중궁궐을 안내하는 내부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광화문 수비대가 근위부대인 훈련대 1대대였고, 대대장이 이두황이었다. 왕비 시신을 확인하고 불을 지른 사람은 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이 과정에서 광화문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훈련대장이 죽었다. 임오군란 때부터 왕비를 지키고 이두황 위에서 동학을 토벌한 홍계훈이었다. 범인들은 일본으로 도주했다. 이두황은 금강산으로 갔다가 걸어서 부산까지 간 뒤 어리를 깎고 변장해 히로시마로 도망갔다.
이토 시치로(伊藤七郞)의 망명
이두황은 이름을 이토 시치로(伊藤七郞)로 바꿨다. ‘이토 아버지의 일곱째 아들’이라는 뜻이다 망명 내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를 지원했다. 기타노잇페이(北野一平)로 살고 있던 우범선이 자객에게 죽었을 때, 이두황은 이렇게 읊었다. ‘하늘에서 달이 떨어지고 바다에서 물이 역류하도다(月落在天水流在海返)’(고 설악 이두황옹 추회록,1928)
비문에는 그가 망명 생활 동안 ‘사방을 유람했다’고 적혀 있다. 일제 강점기 기록인 ‘인물평론’(1908)을 다시 본다. ‘여색을 좋아하고 기생과의 관계도 많음. 누누이 도박으로 승패를 다툼. 여복(女福)은 여전히 동료들에게 시샘을 사고 있음.’ 이두황을 연구한 강창일은 “일본 지성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국모를 살해하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라고 질책했다”고 했다.(강창일,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부관’)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산 이두황
1907년 대한 제국 황제 순종이 을미사변 관련범 사면령을 내렸다. 아버지 고종이 살아 있을 때였다. ‘실제로 짐이 목격한 국모의 원수 우범선 1명에게 당시의 죄를 지게 하면 일체를 해결하기에 이를 것이오’(이토 통감에게 보낸 통감부 경찰사무집행과 박영효 관련 서류, 1907년 8월)
우범선은 죽었다. 위풍당당하게 이두황은 귀국했다. 이두황은 이토 추천으로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됐고 이어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됐다.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관제 개편으로 전북 도장관에 임명됐다. 1916년 3월 9일 이두황이 죽었다. 신장염이 악화된 탓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조문을 보냈다.(매일신보 1916년 3월 10일) 장례식에는 3000명이 참석했다. 운구 행렬은 1만 명이 넘었다. 58세였다.
실패한 부관참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이 이두황 무덤을 파헤쳤다. 차일혁은 우금치전투 때 이두황에 의해 무단 처형된 접주 차치구의 아들이다. 관을 부수고 시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목적이었다. 뜻은 이루지 못했다. 이두황이 화장(火葬)돼 있던 것이다. 그리고 2013년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이 잊혔던 무덤을 찾아냈다. 2016년 시민단체가 기린봉 등산로 입구에 이두황 단죄비를 세웠다. 1908년 ‘인물평론’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의 일대를 훑어볼 때 하늘이 내린 행운아라는 느낌.’ 그 행운아 따위들이 나라를 해먹었으니, 지금 대한민국은 참으로 기적이 아닌가. 여행문화 전문기자
수원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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