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말ㅆ.미
리더의 자격
경향신문 2018년 7월 3일 화요일 29
모 출판인쇄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어느 날 사장실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디자인 단가를 올려야 할지 말지 판단한다고 건당 작업시간을 1시간 단위로 체크해 제출하랍니다. 잡다한 건들을 동시에 처리하는 디자인부로서는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 한동안 손 놓고 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건 1분, 어떤 건 몇 날, 이거 했다 저거 했다 다중작업을 하는데 어떻게 작업한 시간을 낱낱이 옳게 집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30여명이 막차 시간 애태우며 엑셀에 1,1,1,1, 어림짐작으로 제출하니 숫자가 안 맞는다고 다음날 다시!, 그 다음날 또 다시! 해서 그럴듯한 1들로 조작해내느라 1주일 넘게 야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엔 봐도 모르겠다, 단가 올리지 마라 흐지부지 끝났고, 그 1 때문에 일 못한 걸 메꾸느라 다시 또 지탄과 자탄의 야근 나날에 퇴사자도 속출했지요.
그 상황은 오래전 우스개와 꼭 닮았습니다. 죽고 다치면서 대군을 이끌고 천신만고 알프스산맥을 넘는데 정상까지 오른 나폴레옹이 사방을 둘러보고 그럽니다. "어? 이 산이 아닌가 봐." 그 다음 말은 뻔합니다. "야야, 도로 내려가."
속담에 '눈 먼 머리가 몸통을 벼랑으로 이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두머리가 어리석으면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뜻입ㄴ다. 요즘 속담처럼 '못난 제왕은 재앙'입니다. 시키면 다 되고 밀어붙여서 안되는 게 없다 믿어서일까요? 사장실에는 그 뜻 아닌 '궁즉통(窮卽通)' 액자가 자랑스레 걸려 있었습니다.
되든 안되든 일단 해보고 얘기하라 호통일색인 사람은 우두머리 자격이 없습니다. 리더란 길도 아닌 데서 '뚫어라. 궁즉통!' 외치는 돌격대장이 아니라 최적의 루트에 정통한 길잡이이자 노련한 키잡이여야 합니다. 리더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김승용<우리말 절대지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