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1장

서커스

최고선수 2023. 12. 26. 01:52

  서울에 사는 큰 딸이 서커스  예약해 놓았으니  놀러 오란다. 자기는 반차를 냈으니, 금요일에  올라와서 저녁을 먹고 서커스공연을 보러 가자는 것이다.
  어차피 예약을 해 놓았다니, 오전에 올라가서 고속터미널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딸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보통 두 시간 사십 분에서  세 시간이면 가는 길을 명절도 아닌 평일에 세 시간 반도 넘게 걸려서 도착했더니, 벌써 딸이 점심을  먹고  터미널까지 마중 나온 지 한참이나 지났단다.
  전주에서 유명한 삼백집이 보이길래 터미널에서 둘이만 밥을 먹고 집으로 갔더니 재택근무  중인  사위가 반갑게 맞아준다.
  우리가 늦어져서 쉴 새도 없이 딸은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나는 준비해 간 것도 없어서 그저 해 주는 저녁을 먹고 서커스를 보러 갔다.
  잠실운동장에서 한다고 하는데, 길도  모르는 촌사람이라 어두워서 행여나  놓칠세라, 패키지 해외여행 갈 때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꽁무니를 따라갔다.
  드디어 입장을 하니 좀 안정이 된다.
  어렸을 때  남부시장 아래쪽에서 약장사 굿이나 여러 가지 새로운 극을 할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라디오도 아주 귀했고, 오직 극단이나  외줄 타기,  발로 북 돌리기, 원반 돌리기, 외발자전거 타기, 곤봉 던지기와  받기 그리고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아슬아슬한  여러 가지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가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종합운동장의  하늘 위 높은 곳에서 외줄을 타는 오토바이나 레슬링을 단체관람으로 가기도 했었다.
  또한 단오 때 난장에서 이것저것 재미난 구경을 했고, 그 후로는 외국에서 가끔 서커스를 보기는 했지만, 이십 년은 된 것 같다.
아참!  '단오'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큰 딸이 다섯 살 때  단오에 난장을 가기로 했다. 손꼽아 기다리다 단오가 되어  큰 딸을 데리고 난장에 가서, 야바위꾼이며 새로운 물건들과 먹을 것,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이가 자꾸 난장을 간다더니 왜 안 가냐며 울어 댄다. 우리가 여태껏 보고 왔지 않냐고 아무리 말해도 아니라고 난장을 봐야 한다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끝내 난장을 외치며 우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향하다가 생각해 보니, 아이는 난쟁이를 보러  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쟁이를 보러 간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런데 우리 생각으로 요즘에는 난쟁이가 없다고 했으니, 서로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벌써 사십도 훌쩍 넘은 큰 딸의 효도를 만끽하고, 다음 날 청와대 예약으로 서울 구경 을 하고, 점심과 따뜻한 차까지 먹었다.
  추운 날 고생한 딸과 사위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전주로 오니, 그동안 좋지 않은 일로 움츠리고 어두웠던 감정들이 많이 풀린 것 같다.
  고맙다. 우리 딸과 사위 건강하고 재미나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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