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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도 덴마크도 아니다

최고선수 2015. 1. 2. 10:53


경향신문 2015.01.01 목  29


'아인슈타인'도 '덴마크'도 아니다


          김종휘의 횡단보도 (성북문화재단대표)


  갓 젖을 뗀 아이가 참 영특해 보였다. 잘만 키우면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될지 모른다는 설렘이 가시질 않았다. 아이 앞날을 생각하면사소한 선택도 까다로워졌다. 부모는 고심 끝에 '아인슈타인 우유'를 골랐다. 한 해 지나자 욕심이다 싶어 '파스퇴르 우유'로 낮췄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부모의 하향 조정은 계속됐지만 포기하기엔 일렀다. '서울우유'로 다시 한 단계 내려갔던 시간이 지나자 '연세우유'와 '건국우유'를 거쳐 '삼육우유'에 이르기까지 쏜살같았다. 그래도 서울권이니 상당한 눈높이였다.

  다음에는 저쪽 지방대엔 가겠지 하며 '저지방 우유'였다. 다음에는 3년제든 4년제든 대학에만 가라고 '3.4 우유'였다. 이 기대마저 접었을 때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부모는 동창을 만나 신세 한탄을 했다. 친구가 받았다. 우리 아이는 '매일우유' 먹으며 매일 학교라도 가니 다행이라고. 마지못해 '매일우유'로 바꾼 부모는 망연자실했다. 바닥을 친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영특했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자책의 나날이 쌓여갔다. 위안 삼아 부모는 다시 동창을 찾았다.

  "우유 바꿨다. 덴마크 우유로."  굳이 여기서 치이고 밀리고 버둥거리며 살 이유가 있겠냐면서 동창은 머잖아 이민을 간다고 했다. 부모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 땅을 떠날 형편도 못 되는 자신을 돌아보며 막막했다. 부모는 미뤘던 마지막 선택을 했다. '빙그레 우유'였다. 물려줄 재산도 없는데 대학을 나온들 직장에 다니들 짝이라도 찾고 단칸살림이라도 얻소 아이라도 낳아 기를지 기약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늙은 부모랑 같이 살자할 수밖에. 빙그레 웃으며 살자 할 수밖에. 그냥 미생처럼 살아남자 할 수 밖에.

  이 이야기는 2년 전부터 떠돌던 '우유별곡'유머를 약간 각색한 것으로 최근 한 독서모임 강의에서 써먹었다. 참석자는 청소년과 부모가 반반, 주제는 '잘 하려고 하지 마'였다. 요지는 이랬다. 주어진 기준에 맞춰 잘하려고 할수록 망친다. 인생은 나만의 원칙과 방식을 찾아 완성하는 여정이다. 이것은 몇 등 몇 점 목표 삼아 달성해서 얻는 게 아니다. 허허벌판에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그중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진다. 그때 그를 위해 무너가 열심히 하다 보니 나의 원칙과 방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좌중의 부모들은 심각했다. '덴마크 우유'와 '빙그레 우유'의 양자택일이 끝이란 말인가 하는 허탈한 눈치였다. 그러나 청소년들과 반씩 섞인 모둠 토의를 거쳐 의견을 취합하자 '우유 안 먹어도 돼'로 결론이 바뀌어 있었다. 작년 1월 17일 EBS<하나뿐인 지구>에서 방영한 '우유, 소젖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가 인용됐다. 포유류 중 젖을 떼고도 평생 소젖을 먹는 종은 사람뿐이며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는 것도 환상임을 공유했다. 칼슘 함유량도 우렁이, 검정깨, 잔멸치, 생김, 꽁치, 검정콩, 조갯살, 대두, 우거지 등이 우유보다 훨씬 많았다.

  발랄해진 분위기는 '우유의 진실'을 논하다가 또 심각해졌다. 평균수명 25년의 젖소는 생후 3년이 차야 하루 3리터의 젖을 생산한다. 반면 공장식 낙농장에선 성장호르몬을 맞고 생후 1년부터 하루 30리터 젖을 생산한다. 이렇게 사육된 젖소는 4~5년 후 용도 폐기 된다. '아인슈타인'부터 '덴마크'까지 어떤 브랜드를 붙이든 어느 대학이 만들든 우유의 생산과 소비는 젖소와 사람의 생명에 반(反)하고 있다. 이렇듯 공장에서 젖소 키워 우유 짜내는 현실과 우리의 교육은 중첩되어 있었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좋은 학원에 보내고 과외를 시키기 바빴습니다. 제가 만든 틀에 아이를 끼워 맞춰 다그치고 잔소리만 했던 것 같습니다. 고운이를 잃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 사랑한다고 더 자주 말해줬어야 했습니다." 지난 12월 25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편지글이다. 안산 단원고 2학년 1반 고 한고운양의 어머니 윤명순씨가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보내며 썼다.

  그날 독서모임은  파커 파머의 <아픈 마음의 정치학>의 한 구절을 낭독하면서 마쳤다. "우리가 존재할 때 우리 마음은 닫혀 있다. 가르침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르침을 머리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음이 부서지면서 그 가르침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인용문의 "가르침"을 '아이'로 바꿔 읽었다. 젖을 뗀 아이의 인생은 '아인슈타인'이나 '덴마크'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이 부서지는 자리에서 시작되는가 싶었다. 새해 첫날, 부서진 마음의 부모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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